
같은 물건이라도 외형의 크기가 작을수록 더 대접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휴대를 위해 만들어진 컴퓨터 관련 제품들이 대표적인 예다. 그 중 가장 흔한 제품을 꼽으라면 USB 메모리를 꼽을 수 있다. 컴퓨터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이라면 적어도 하나 이상씩 가진 USB 메모리는 외형이 작으면 작을수록 더 주목을 받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레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현재 시판 중인 가장 작은 제품은 컴퓨터의 USB 포트에 꽂은 상태에서 돌출부위가 겨우 5mm 정도밖에 안 되는 USB 메모리이다.
나 역시 작은 크기로 디자인된 USB 메모리에 거의 병적인 집착을 한 편이었다. 될 수 있으면 길이와 폭이 짧고 두께가 얇은 USB 메모리를 찾아다녔으며, 어떤 경우에는 이미 충분한 용량의 USB 메모리가 있음에도 단지 외형이 더 작다는 것 때문에 또 구입을 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작고 작았던 USB 메모리들은 내 곁에 오래 붙어 있지 못했다. 분명히 간편한 휴대를 명목으로 구입해서 가지고 다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에 내 USB 메모리를 기증하며 다니는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비자발적이면서 의도하지도 않은 기증이었다. 더 간단히 표현하자면 여기저기에 분실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몇 달 전, 애인으로부터 다소 생뚱맞은 USB 메모리를 하나 건네 받았다. 지속형 인슐린(long-acting insulin) 제제를 공급하는 한 제약회사가 판촉물로 나눠준 USB 메모리였다. 이 회사에서 판매 중인 인슐린 주입기의 모양을 본뜬 USB 메모리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길이가 7.8cm, 지름이 1.7cm에 달해 요즘 것들에 비하면 상당히 큰 제품이었다. 게다가 이런 크기의 제품을 휴대전화에 산뜻하게 달고 다닐 수 있게 만들어 놓으면 우스운 모양새가 나와 그런지 몰라도 긴 목걸이까지 달려 있었다. 바야흐로 시대에 정확히 역행하는 엉뚱한 디자인의 USB 메모리였던 것이다.
애인에게 건네 받으면서 그냥 색다른 디자인의 USB 메모리를 하나 수집했거니 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크기의 USB 메모리를 휴대한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비합리적인 행동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 엉뚱한 크기의 USB 메모리는 오늘까지도 내가 가장 열심히 휴대하고 다니는 USB 메모리가 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USB 메모리의 단점이었던 외형의 크기가 그 중요한 이유였다.
USB 메모리는 무형의 컴퓨터 파일들을 안전하게 담는 유형의 운반체이다. 즉, 무형의 형태를 유형의 형태로 보여줌으로써 사용자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안전하게 느끼게 해 준다. 이런 면에서 애인이 건네주었던 USB 메모리는, 오히려 다소 큰 외형의 덕분에 내가 무엇인가를 그 안에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또한, 인슐린 주입기 모양을 본뜬 디자인은 묘한 신뢰감을 주는 모양새를 갖추어서 뭔가 중요한 파일들이 그 안에 있을 것만 같은 이미지를 주었다. 게다가, 다소 거추장스러운 목걸이용 긴 끈은 어디에 놓여 있든지 무엇인가에 거치적거리게 되어 혹시라도 어딘가에 깜박 놓고가는 위험을 충분히 줄여주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결코 애용할 것 같지 않았던 엉뚱한 크기와 디자인의 USB 메모리는 현재 가장 아끼며 잘 사용하는 USB 메모리가 되었다. 지금도 내 노트북 PC에 꽂혀 있는 USB 메모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이 녀석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톡톡히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바로 첫인상만 가지고 대상을 쉽게 평가해 버리는 우를 범 치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 대상과 일정 시간 이상 교감을 나눈 후에 평가해도 충분한 경우가 많고 처음에 발견치 못했던 대상의 진가를 발견할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그러면서 요즘엔 아예 외장 하드를 들고 다니고 있네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