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rik's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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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BILO swing cool 형광펜. 뜻하지 않게 산 것이지만,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형광펜이다. © 2009 ibrik

 

사람은 저마다 개인적 터부(taboo)를 하나 이상씩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책에 메모하거나 줄을 치지 않을 것’ ---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책에 대한 나의 개인적 터부였다. 물론, 이 터부의 예외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과 교과서였다. 이 두 종류의 책을 제외한 나머지 책에 적용되던 나의 개인적 터부 덕분에, 책꽂이에 자리 잡은 책은 언제나 새것 같은 느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터부가 깨진 것은 스물일곱 살 무렵이었다. 책의 어느 부분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는지 기억하는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책을 읽으며 상기해야 할 부분에 일정한 표시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형광펜으로 필요한 문장에 줄을 그어 놓는 것이었다.

터부는 동일성과 체계 그리고 질서의 유지라는 순기능을 가진다. 하나의 터부가 깨지면서 오래지 않아 새로운 터부를 또 하나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형광펜으로 표시하되 연두색 형광펜을 사용한다.’라는 것이었다. 어떤 책이든 연두색 형광펜이 칠해져 있도록 함으로써 표식에도 동일성과 체계 그리고 질서를 부여하려는 욕구가 투영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에게 있어서 독서는 곧 형광펜, 그것도 연두색 형광펜을 소비하는 행위 자체였다. 이렇다 보니 전에 없던 부작용이 하나 생겨났는데, 그것은 바로 형광펜을 빠트리고 책만 지니고 있을 때, 야릇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이었다. 형광펜으로 중요한 부분에 줄을 쳐 놓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불완전한 책읽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럴 땐 차라리 가까운 문구점에 가서 형광펜을 사는 게 여러모로 유익하다는 것을 터득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STABILO swing cool 형광펜을 쓰기 시작한 날도 책만 가져온지라 묘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날이었다. 그 당시 문구점에 들어가 한참 동안 선을 그러보며 골랐던 펜인데, 요 며칠 사용해 보니 상당히 맘에 든다. 직사각형 펜대의 적당한 길이와 두께 덕분에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형광펜을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고, 종이에 완전히 밀착되도록 디자인된 펜 끝을 통해 형광잉크를 균일하게 칠할 수 있다. 또한, 이전까지 즐겨 사용하던 형광펜들에 비해 크기도 작고 무게도 가벼워 휴대하기가 한결 낫다.

당분간은 이 형광펜을 계속 사서 쓸 듯하다. 몇 년간 묵묵히 책읽기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던 STAEDTLER Textsurfer classic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 함께 읽을 만한 책: 윌리엄 블레이즈,『책의 敵』, 이종훈 옮김, 서해문집, 2005.

by ibrik | 2009/07/30 00:53 | diary | 트랙백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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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루아 at 2009/07/30 02:08
하하,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한동안 펜이 없으면 불안해서 책을 읽을 수 없었지요. 헌데 줄을 그으며 책을 보다 보니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지는 듯 해서 관뒀답니다...
Commented by ibrik at 2009/07/31 16:54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이 반드시 있는 듯합니다. 필요에 따라 선택을 잘 할수 있는 지혜가 그래서 더욱 중요한 듯싶습니다. :)
Commented by latro at 2009/07/30 10:28
언젠가는 자를 대고 줄을 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책의 연습장화 입니다.
개귀 만들어 귀퉁이 접고 삐뚤빼뚤 줄 치고 메모하고 ㅎㅎ.
Commented by hschoi at 2009/07/30 11:22
개귀를 만드는 것은 뭔가요? @.@
Commented by latro at 2009/07/30 12:20
http://en.wikipedia.org/wiki/Dogear
책 모퉁이 접어 놓는 거요. 히히.
Commented by hschoi at 2009/07/30 18:08
아하~ 전 개귀라고 해서 뭔가 살짝 찢어서 모양을 내서 접어놓는 것인줄 알았습니다. =)
Commented by ibrik at 2009/07/31 16:57
하하, 그러셨군요! 저도 줄을 칠 땐 늘 자를 이용해서 그 심정에 공감이 갑니다. 필통 안에는 늘 15cm 자가 필수적으로 들어 있었지요.
'Dogear'는 우리말로 옮겨 놓으니 약간 모호한 뉘앙스가 되네요. 재밌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
Commented by hschoi at 2009/07/30 11:23
전 형광펜들은 뒷면에 비치기도 하고 이래저래 좀 맘에 안드는 경우가 많아서,
형광색연필을 사용하는 편이예요. =)
Commented by ibrik at 2009/07/31 16:59
고체보다는 액체의 질감을 좋아해서 형광색연필은 좀처럼 적응을 못 하겠더라! :)
Commented by suha at 2009/07/30 12:54
저 형광펜 좋아요. :) 근데 textsurfer가 가늘어서 휴대하기에는 더 좋은 듯 하기도 하고 말이죠.
Commented by ibrik at 2009/07/31 17:01
아, 얇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triplus textsurfer'를 지칭하는 듯합니다. 가방이나 필통에 넣고 다니기에는 'triplus textsurfer'가 훨씬 좋은데, 전 주로 형광펜을 언제라도 쓸 수 있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textsurfer classic'을 이용했답니다. 짧고 넓적해서 주머니에 넣기엔 이게 더 낫거든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7/31 23:53
지하철에서는 형광펜으로 줄을 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제가 즐겨쓰는 형광펜은 얼마전 강남역에서 학원 광고물로 나눠준 것입니다 :)
Commented by ibrik at 2009/08/01 09:03
정말 공감합니다! 지하철에서 형광펜을 사용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 미묘한 불편함을 보게 되어 더 반갑습니다. :) 처음에는 삐뚤삐뚤하게 그려지는 선이 자꾸 맘에 걸렸는데, 그래도 지금은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역시 사람은 어떤 것이나 적응할 수 있는 존재인가 봅니다. 저도 얼른 아무 형광펜을 써도 같은 느낌으로 줄을 그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첫 댓글,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Claire at 2009/08/01 08:27
저 역시 교과서가 아닌 책은 읽은 책이라도 새것과 다름없을 만큼
책을 애지중지 다루는 타입인데..
본의아니게 전공과 관련된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서평을 써내야 해서
형광 색연필로 줄을 그었던 기억이 나네요
개인적으로는 형관펜보다는 번짐이 없는 형광 색연필을 선호합니다 ^^
저는 주로 스태들러 형광 색연필을 쓰고 있어요
Commented by ibrik at 2009/08/01 09:07
책에 아무 표시를 하지 않고 거의 새것과 다름 없이 읽어나가시는 유형이라니, 정말 반갑습니다. 이제는 책에 줄을 치는 것은 극복(?)했는데, 아직 특정한 쪽을 표시하기 위해 접는 것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아마 Claire님도 그러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 댓글,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copacetic at 2009/08/04 21:48
저랑은 전혀 반대시네요.. 저는 연필로 쫙쫙 그어가며 읽는 스타일이라 ^^
책을 아끼지 않는다는 핀잔도 많이 듣고는 합니다 :)
Commented by ibrik at 2009/08/06 00:49
책을 너무 함부로 다루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너무 신줏단지 모시듯이 하는 것도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겠지요. 저도 공부하는 것을 목적으로 읽는 책은 종횡무진 볼펜으로 줄을 긋고 표시를 해 가며 읽는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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