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저마다 개인적 터부(taboo)를 하나 이상씩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책에 메모하거나 줄을 치지 않을 것’ ---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책에 대한 나의 개인적 터부였다. 물론, 이 터부의 예외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과 교과서였다. 이 두 종류의 책을 제외한 나머지 책에 적용되던 나의 개인적 터부 덕분에, 책꽂이에 자리 잡은 책은 언제나 새것 같은 느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터부가 깨진 것은 스물일곱 살 무렵이었다. 책의 어느 부분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는지 기억하는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책을 읽으며 상기해야 할 부분에 일정한 표시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형광펜으로 필요한 문장에 줄을 그어 놓는 것이었다.
터부는 동일성과 체계 그리고 질서의 유지라는 순기능을 가진다. 하나의 터부가 깨지면서 오래지 않아 새로운 터부를 또 하나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형광펜으로 표시하되 연두색 형광펜을 사용한다.’라는 것이었다. 어떤 책이든 연두색 형광펜이 칠해져 있도록 함으로써 표식에도 동일성과 체계 그리고 질서를 부여하려는 욕구가 투영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에게 있어서 독서는 곧 형광펜, 그것도 연두색 형광펜을 소비하는 행위 자체였다. 이렇다 보니 전에 없던 부작용이 하나 생겨났는데, 그것은 바로 형광펜을 빠트리고 책만 지니고 있을 때, 야릇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이었다. 형광펜으로 중요한 부분에 줄을 쳐 놓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불완전한 책읽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럴 땐 차라리 가까운 문구점에 가서 형광펜을 사는 게 여러모로 유익하다는 것을 터득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STABILO swing cool 형광펜을 쓰기 시작한 날도 책만 가져온지라 묘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날이었다. 그 당시 문구점에 들어가 한참 동안 선을 그러보며 골랐던 펜인데, 요 며칠 사용해 보니 상당히 맘에 든다. 직사각형 펜대의 적당한 길이와 두께 덕분에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형광펜을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고, 종이에 완전히 밀착되도록 디자인된 펜 끝을 통해 형광잉크를 균일하게 칠할 수 있다. 또한, 이전까지 즐겨 사용하던 형광펜들에 비해 크기도 작고 무게도 가벼워 휴대하기가 한결 낫다.
당분간은 이 형광펜을 계속 사서 쓸 듯하다. 몇 년간 묵묵히 책읽기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던 STAEDTLER Textsurfer classic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개귀 만들어 귀퉁이 접고 삐뚤빼뚤 줄 치고 메모하고 ㅎㅎ.
책 모퉁이 접어 놓는 거요. 히히.
'Dogear'는 우리말로 옮겨 놓으니 약간 모호한 뉘앙스가 되네요. 재밌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
형광색연필을 사용하는 편이예요. =)
제가 즐겨쓰는 형광펜은 얼마전 강남역에서 학원 광고물로 나눠준 것입니다 :)
첫 댓글, 감사합니다.
책을 애지중지 다루는 타입인데..
본의아니게 전공과 관련된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서평을 써내야 해서
형광 색연필로 줄을 그었던 기억이 나네요
개인적으로는 형관펜보다는 번짐이 없는 형광 색연필을 선호합니다 ^^
저는 주로 스태들러 형광 색연필을 쓰고 있어요
첫 댓글, 감사합니다.
책을 아끼지 않는다는 핀잔도 많이 듣고는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