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rik's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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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04일
커피 필터와 사도 바울

부엌 찬장을 뒤지다 발견한 낯선 상표의 커피 필터. ‘C&M Borg’는 무려 123년의 역사를 지닌 커피회사다. © 2009 ibrik


사도 바울(Paul)에게 로마는 궁극의 목적지였다. 그가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로마서)는 로마를 향한 열정으로 시작하고, 로마 방문을 향한 갈망으로 마무리된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담은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는데, 이 기록은 사도행전 전체 내용의 삼분의 일가량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로마행 속에는 지중해의 한 섬이 등장한다. 사도 바울을 태운 배가 태풍을 만나 난파되고 우여곡절 끝에 한 육지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 육지가 바로 지중해 중심에 있는 한 섬이었다. 낯선 섬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그곳 원주민들로부터 신으로 추앙을 받는 엉뚱한 일을 겪게 된다. 가까스로 섬의 해안가로 헤엄쳐 온 일행이 때마침 내린 비 때문에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그 섬의 원주민들이 불을 피워 주는 과정에서 발생한 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곳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히 친절을 베풀었다. 비가 오고 날이 추워서 우리가 흠뻑 젖자, 그들은 큰 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우리를 모이게 했다. 바울도 힘껏 거들기 시작했다. 그가 나뭇가지 한 다발을 모아다가 불에 넣자, 불 때문에 깨어난 독사가 그의 손을 물고 놓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바울의 손에 매달린 뱀을 보고, 그가  살인자여서 응분의 벌을 받는 것이라 단정했다. 바울은 손을 털어 뱀을 불 속에 떨어 버렸다. 그는 물리기 전과 다름 없이 멀쩡헀다. 그들은 그가 급사할 것으로 예상했다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이번에는 그가 신이라고 단정했다!' (사도행전 28:2-6, 메시지 신약)

섬에 상륙하자마자 이렇게 신으로 오인을 받기도 한 사도 바울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섬에서 다시 로마로 향하기 전까지 무려 석 달 동안 지내게 된다. 신약 성서 사도행전 28장에 등장하는 이곳은 지중해 어딘가에 있는 막연한 섬이 아니라 지금도 가 볼 수 있는 곳인데,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남쪽 93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작은 섬나라 ‘몰타(Malta)’이다.

'인원을 점검해 보니, 모두가 무사했다. 우리가 있는 곳이 몰타*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도행전 28:1, 메시지 신약)

어제, 커피 필터가 떨어져 부엌 찬장을 뒤지는 도중 낯선 상표의 필터를 발견했다. 상표가 인쇄된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서야 낯선 상표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종이 하단에 적혀 있는 ‘Malta’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일전에 동생이 몰타에서 몇 개월 동안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귀국하면서 함께 딸려온 필터였던 것이다. 약 1950년 전, 사도 바울이 석 달 동안 머물렀던 그 섬에서 건너온 커피 필터라니! 상표가 인쇄된 종이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왠지 저 솜브레로(sombrero)를 쓴 사람을 대신해서 성경책을 든 사도 바울이 그려져 있어도 그럴싸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매년 2월 10일, 몰타에서는 ‘성 바울 난파 축전(The Feast of St. Paul's Shipwreck)’이 열린다고 한다.







* 몰타(Malta)의 고대 그리스어 지명은 ‘Μελίτη’이며 이를 전사(轉寫)하면 ‘Melítē’가 된다. 우리나라의 개역개정, 개역한글,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현대 지명 대신 고대 그리스어 지명를 음역하여 ‘멜리데’라 표기하고 있다.


by ibrik | 2009/12/04 13:56 | diary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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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퐝퐝 at 2009/12/04 14:17
'난파 축전' 이래서 엥? 하고 옆에 영어 설명을 보니 이해가 되네요. 재밌네요~ 난파 축제라. 몰타에 대해서 검색해보니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네요 ^^
Commented by ibrik at 2009/12/11 16:47
몰타는 저도 아직 가 보지 못했는데, 저 역시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과 관련된 여러 가지 유적들이 남아있다고 하니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Commented by JK at 2009/12/05 23:25
몰타고 가보고 싶은 도시군... 그렇네...
Commented by ibrik at 2009/12/11 16:48
아니, 몰타에 ‘모를 타고’ 가고 싶은지 안 써 놨네? :)
Commented at 2009/12/08 18: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ibrik at 2009/12/11 16:49
네, 감사합니다. 답글 달아놓겠습니다. :)
Commented by 나막신 at 2009/12/08 22:43
와.. 바울의 로마 여정에 이곳이 있었다니 꿈에도 상상치 못했네요. 제 친구가 그곳에서 어학연수를 갔다왔었거든요. 고대 유적에 대해서만 얘기해주었었는데..참 신기해요. 용감한 사도 바울이 더더욱 멋지게 느껴집니다.
Commented by ibrik at 2009/12/11 16:51
아마도 한글 성서의 지명이 현대 지명으로 나와 있지 않아서 알 기회가 없으셨을 듯합니다. 가끔은 성서의 지명과 현대 지명을 잘 연결해 주면 좀 더 흥미를 느끼고 성서를 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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