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rik's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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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茫十里霧’. 강극성(姜克誠)의 이 시구가 떠오르는 아침이었다. © 2010 ibrik


집 근처에는 한 그루 나무가 있었다. 봄이면 연둣빛 새순이 돋아 시작의 설렘을 가져다주었고,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에 한껏 하늘거리는 초록빛 잎사귀가 생명의 싱그러움을 선사해 주었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의 색이 비슷해진다 싶으면 가을이었다. 나무는 서서히 단단한 가지를 뽐내며 드러냈는데 그것은 곧 겨울이 왔음을 의미했다. 해가 바뀌어도 나무는 그 자리에 그렇게 서서 계절의 순환을 한결같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누가 베어 갔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무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서서히 걸어나갔다. 잔상같이 희끄무레한 나무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실루엣은 좀 더 단단해졌고, 그 앞에 이르렀을 땐 어제의 그 나무가 그대로 거기에 변함없이 서 있었다.

나무는 존재했다. 다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나무의 존재를 의심케 했을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등가를 이루지 않을 때도 있다.



by ibrik | 2010/01/20 23:55 | diary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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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griong at 2010/01/21 10:29
서서히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사람의 인연도 이런 안개같습니다. 또는 앞으로 만나게될 사람들도 아직은 옆에 없지만 언젠가 또다시 만나게 되겠죠. 그래도 어여빨리 해가 쨍쨍 나면 좋겠습니다 :)
Commented by ibrik at 2010/01/26 01:14
'안개'를 통해 '인연'의 신비를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Commented by 탄스타플 at 2010/01/26 22:58
보이는 것이 본질을 호도하는 때도 있지요.
어쩌면 정말 문제는 우리가 느끼는 현상에만 집중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면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으면 좋을텐데요.

종종 놀러올게요. : )
Commented by ibrik at 2010/01/27 15:29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가 더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런 듯합니다. 말씀처럼 대상이나 현상의 표면과 그 이면을 고르게 볼 수 있는 균형 있는 마음과 눈이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방문해서 댓글 남겨주신 것 감사합니다. 종종 놀러 와 주신다니 더더욱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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